[JBC시선]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도요타 다이쥬(김대중)의 용일(用日)
[JBC시선]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도요타 다이쥬(김대중)의 용일(用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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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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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박정희 전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과 징용 해법 제시에 대해 야권과 시민단체, 일부 우파 세력들까지 가세한 반일 죽창가가 거세게 울려퍼지고 있다. 이들은 또다시 친일파 사냥에 나서고 있다. 친일파 논쟁을 할 때 빠지고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박정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부류는 진보 좌파들이다. 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친일 논쟁은 그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썼니 안썼니부터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를 하면서 독립군을 때려잡았니 안잡았니, 나아가 박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였다는 등 여러 주장이 그 근거다.

또 우파들은 김 전 대통령이 일본 천황이 작고했을 때 분향소를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조문한 것을 두고 두고 비판의 쏘시개로 이용하고 있다. 우파들은 이를 두고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진짜 친일이라 맹공을 펼치지지만 문재인과 이재명은 이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좌파들은 박 전 대통령이 친일파였던 근거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라는 창씨개명 예를 들고 있다. 그러면 도요타 다이쥬로 개명한 김대중도 친일파인가.

좌파든 우파든 이런 두 사람에게 감히 친일파라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살아생전 두 사람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서로간 반목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정치적 최대 라이벌로 살아왔지만 한일 관계와 관련해선 변화와 미래를 지향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해방된 지 20년 만인 19656월 한일협정을 맺어 국교를 정상화했다. 청구권자금 3억달러와 경제 차관 2억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식민 지배 피해에 대한 모든 배상을 포기하기로 약속했는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를 주장하는 반정부 시위가 격렬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당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박 전 대통령은 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해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불구대천이지만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을 잡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고 했다. 경제성장에 대한 산업계 요구와 동맹인 미국의 관계 개선 압박이 병존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반일(反日)보다 용일(用日)을 우선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 의식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김 전 대통령 역시 1998년 한일이 과거사를 직시하되 미래로 가자는 내용의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이끌어내 한일 관계가 전기(轉機)를 맞이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으로 국내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모든 여건이 과거와 다르고 앞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1973년 일본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주도하에 괴한들에게 납치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에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관련자 처벌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왜색 문화라는 여론의 반대에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했고, 이는 한국 대중문화의 다양성과 일본 내 한류의 출발점이 됐다.

산업화 세력의 상징인 박 전 대통령과 민주화 세력의 상징인 김 전 대통령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처럼 일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있다.

일제 강점기 태어났던 두 사람(박정희 1917년생, 김대중 1924)은 우선 일본어에 능통하다.

두 사람이 일본어에 능통했던 것은 당시 한국어 말살 정책을 펼쳤던 일본이 한국 학교에서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고 배우도록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또 식민지 통치를 본격화하면서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창씨개명’. 한국인의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박 전 대통령 일본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 박 전 대통령은 1942년 일본 육사에 편입해 졸업을 한 뒤 1944년 육군 소위로 임관할 때까지 다카키 마사오로 불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대통령 일본 이름은 도요다 다이쥬’.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면 목포상고 재학시절 담임선생이었던 무쿠모토 이사부로씨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말로 “‘先生,豊田です(선생님, 도요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일본의 한 언론이 소개한 적도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교편 생활을 했던 박 전 대통령은 그후 일본 장교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인이 세운 해운회사로 취업했다.

비록 시대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일본 천황(일왕)과도 관계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평민당 총재시절인 지난 891월 일본 히로히토 천황(1901429~ 198917)이 작고하자 주한일본 대사관저 분양소를 찾아 90도 허리굽혀 조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바탕 곤혹을 치렀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의 장교였을 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 천황이 히로히토 였다.

두 사람의 터닝포인트도 일본과 그 궤를 같이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차관을 들여와 한국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된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면서 민주화 화신으로 불렸다.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살아온 방식과 환경이 달랐지만 삶만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난 두 사람은 굴곡 많은 삶과 지도자의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부하의 총탄에 맞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김 전 대통령은 살아생전 용서하고 화해하며 모든 것을 털고 갔다. 현재 두 사람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나란히 누워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은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바로 우리의 아픈 역사 삶이었다. 일본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이제 극일의 나라가 됐다. 지난달 31일 미국 매체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the planet's most powerful countries)' 조사 순위에서 한국이 전년보다 2계단 오른 6위에 발표됐다. 8위에 오른 일본보다 앞선 것으로 드러났다.

전 세계에서 한국의 국력이 세지면서 일본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놀랍고 경이로워할 정도다. 세계 경제 대국 일본의 크고 작은 기업들은 세계경쟁 시장에서 한국의 기업들에게 밀려났다. 불과 90년대만 해도 삼성이 일본 전자 회사 자존심 소니를 역전 시킬 줄은 누가 알아겠는가. 일본은 전방위에서 한국의 기업들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미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선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의 적수가 되지 못한채 뒤로 밀려났다.

윤 대통령은 2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생중계로 진행한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이날 그동안 한일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 파국 일보 직전에서 방치됐다과거는 직시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방일외교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굴종외교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홍준표 대구시장은 21일 오전 자신의 페북에 “5000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굴종보다 더한 것도 대통령은 선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서 만큼은 국민의 비판을 감수하고 '굴종' '굴욕'을 뒤로 미룬 채 용일(用日)을 선택했다. 두 사람이 반일(反日)보다 용일(用日)의 길로 갔다면, 윤 대통령은 극일(克日)의 길로 가야한다. 과거는 잊고 새롭게 일본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자는 목표 아래 반일(反日)이라는 감정 대신에 극일(克日)만이 21세기 식민사관 반일종족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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