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보톡스, 굿.…‘세월호 7시간’ 괴담에 검찰 ‘실체없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일어난 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을 둘러싼 이른바 '세월호 7시간' 의혹은 결국 실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018년 7월 말 문재인 정부 시절 검찰은 세월호 사고 관련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언론 브리핑에서 “박 전 대통령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방문 전후 줄곧 관저에 머문 것으로 확인됐다”며 “최순실씨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다른 인사의 출입도 없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 밖으로 외출을 하거나, 중대본 방문을 전후해 최씨와 이재만·안봉근·정호성 등 ‘문고리 3인방’ 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만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검찰이 △청와대 국가안보실 근무자 26명 △청와대 비서관 8명 △청와대 행정관·경호관 16명 △관련기관 인사 13명 등 63명을 110차례에 걸쳐 조사해 내린 결론이다.
검찰이 밝힌 박 전 대통령의 사고 당일 행적은 이렇다. 박 전 대통령은 오전 10시 20분쯤 최초 사고 내용을 보고받고 2분 뒤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에게 전화로 구조를 지시했다. 그리고 오후에 청와대 관저로 방문한 최순실 씨 등과 짧게 회의를 한 뒤 미용사를 불러 화장과 머리 손질을 했고, 오후 5시15분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중대본에 갔다.
박 전 대통령이 사고 당일 머문 장소는 청와대 관저와 중대본, 청와대 내부에서 박 전 대통령과 만난 사람은 회의에 동석한 최씨와 문고리 3인방을 제외하면 미용사뿐이라는 게 검찰의 결론이다.
당시 야권에서는 대면 보고와 대통령 주재 회의가 없었던 점을 들어 ‘사라진 7시간’ 의혹을 제기했다. 세간에는 음모론도 돌았다. 박 전 대통령이 특정 인사와 호텔에서 밀회를 나눴다거나 청와대 관저에서 기치료를 받았다, 성형 시술을 받은 뒤 프로포폴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는 말도 나왔다.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2014년 8월 일본 산케이신문의 서울지국장이던 가토 다쓰야는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누구와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한국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과 관련된 루머들이 돌고 있다’는 내용을 다뤘다. 산케이신문은 익명의 증권가 관계자 등을 인용해 박 전 대통령이 과거 자신의 비서실장이었던 정윤회씨와 접촉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지난 2016년 11월 19일 홈페이지에 ‘세월호 7시간, 대통령은 어디서 뭘했는가?-이것이 팩트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청와대는 박 전 대통령이 사고 당일 오전 10시 국가안보실로부터 서면으로 처음 보고 받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이 오전 10시 15분과 22분 김장수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인명구조 등을 지시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보고를 받은 횟수 등에 대해서도 ‘실시간으로, 20~30분 간격으로 시시각각 11회 서면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세월호 7시간’ 의혹은 탄핵 국면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유영하 변호사는 2016년 11월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 사생활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 달라”고 말해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이 밝힌 수사결과는 “세월호 7시간 의혹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최씨 외에 외부인이 관저에 들어온 것은 확인된 바 없다”고 했다. 최씨의 방문도 사전에 약속된 만남이었다고 한다.
최 씨는 이날 오후 2시 15분쯤 청와대 관저를 방문했다. 최 씨의 방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정호성·이재만·안봉근 비서관이 미리 관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씨 등과 회의를 통해 중대본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검찰 관계자는 “최씨가 관저에 들어오며 정 전 비서관에게 상황을 물었고, 정 전 비서관은 ‘중대본에 방문하는 게 좋겠다’는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의 의견을 전달했다”며 “회의에서 최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이를 제의했고, 박 전 대통령이 수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4시 33분 관저를 나와 정부서울청사에 있는 중대본으로 출발했다. 중대본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40여 분이 걸렸다. 이는 당시 인근에 교통사고가 발생해 시간이 지연됐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사고에 관해 보고를 받은 횟수와 시점도 당시 청와대의 해명과 검찰 조사 결과에 차이가 있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오후와 저녁 각각 1차례씩 단 2차례에 걸쳐 서면으로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왜 관저에 머물렀을까. 이도 의문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동안 청와대 본관에서 열리는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국무회의 등 회의나 외부행사 등 공식 일정을 마치면 바로 관저로 복귀했다. 또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2014년 4월 무렵에는 정 전 비서관에게 지시해 수요일에는 공식 일정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사고 당일 박 전 대통령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며 “시술이나 이런 문제는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힌다”고 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과의 접촉 의혹이 있었던 최순실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씨에 대해 이번 수사에서는 별도의 조사를 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서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 수사하며 정 씨의 동선과 행적을 충분히 검증했다는 이유다.
◆“내가 정윤회와 밀회?” 박근혜 직접 밝힌 ‘세월호 7시간’
지난 해 10월 말 박 전 대통령은 중앙일보 연재 ‘박근혜 회고록’을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침몰하면서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학생 등 304명이 희생돼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사고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기억”이라며 “국민 여러분께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점에 대해 이 회고록을 빌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며 고개를 숙였다.
박 전 대통령은 이번 회고록에서 소위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 처음으로 소상히 밝혔다. ‘세월호 7시간’은 박 전 대통령에게 안보실로부터 첫 보고가 들어간 오전 10시 20분부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모습을 드러낸 오후 5시 15분까지를 의미한다. 이때의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을 놓고 그간 많은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랬기에 당시 세간에서 나와 관련해 제기됐던 온갖 의혹이나 추문에 대해서 일일이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그게 또다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했다”고 회고했다.
아래는 박 전 대통령이 밝힌 회고록 요약이다.
3월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약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헤이그는 이미 밤이었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한·중 정상회담을 위해 곧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야 했다. 북한 핵 문제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문제 등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어 열린 핵안보 정상회담도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53개국 정상이 참석한 국제회의였다. 헤이그 일정을 마친 뒤엔 3일간의 독일 순방이 이어졌다.
이렇게 5박7일간의 빡빡한 순방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엔 시차 적응까지 겹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일정이 연일 이어졌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실상은 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이런 나의 상태가 주변에 아슬아슬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하루는 정호성 비서관이 나에게 “대통령님, 차라리 하루만 일정을 비우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 사실 나도 ‘이러다가 큰일나겠다’ 싶었던 차라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무리하게 몸을 축내는 것보다 관저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저라고 해도 서재나 책상 등이 있어 충분히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다. 그렇게 해서 쉬기로 한 날이 바로 운명의 날인 4월 16일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야당에선 내가 이날 왜 본관에 가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는지를 놓고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호성 비서관은 쉬기로 했던 4월 16일에 나의 연가 신청을 처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공식적인 자체 휴일 정도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날을 공식 휴가로 생각했던 나와 혼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날 무수히 벌어진 혼선의 예고편이었다.
4월 16일 오전은 당연히 공식 일정이 없었지만 일상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관에는 가지 않는 대신 관저에서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보고서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세월호가 기울어진다는 신고가 119에 처음 접수된 것은 이날 오전 8시 54분이다. 김장수 안보실장이 사고 발생을 인지한 것은 9시30분, 상황보고서 초안을 받고 나에게 직통전화를 걸었던 때가 오전 10시 12~13분이었다.
이때까지 사고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나는 보고서를 읽다가 참고할 자료를 찾느라 휴대전화를 놔둔 채 다른 방에 가 있었다.
쉬는 날인 만큼 경계심이 다소 느슨해진 면도 있었다. 휴대전화를 그곳까지 들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김 실장은 계속 통화를 시도하기보다 안보실 직원을 통해 상황보고서 1보를 바로 관저로 보냈다. 그때가 오전 10시20분이었다. 많은 이가 비판하듯이 이때 나에게 첫 보고가 들어오는 데 약 7~8분이 늦어진 것이다.
보고서를 받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배 안에 수 백 명이나 탑승하고 있다고 하니 무엇보다 이들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곧바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객실 곳곳을 다 찾아서 누락 인원이 없도록 하세요”라고 지시했다(오전 10시22분).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배 곳곳을 샅샅이 다 뒤져야 합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해경특공대라도 투입해 여객선의 객실과 엔진실까지 철저하게 확인해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세요”라고 주문했다(오전 10시 30분).
이것이 세월호 사고 발생을 인지한 직후 청와대의 첫 대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30분쯤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울어져 복원력을 상실했고, 1시간 뒤에는 거의 침몰한 상태였다(오전 10시 30분).
하지만 당시엔 아직 현장 화면이 확보되지 않았고, 침몰 사실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구조 장비를 총동원하고 해경이 투입되면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와대의 대체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이후 국가안보실을 통해 두 차례(오전 10시40분, 오전 11시20분) 상황보고서가 도착했지만, 배가 침몰했다거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하는 내용은 없었다.
오전 11시쯤 관저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당시 YTN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나는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언론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안보실은 해경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올라온 보고들을 취합해서 가져오기 때문에 이런 급박한 사고 때는 오히려 보고가 언론 보도보다 늦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전 11시20분 안보실에서 보낸 세 번째 상황보고서에 구조된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을 때도 나는 다음 보고에는 추가 구조 인원이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은 4월 16일 오전 10시부터 내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방문한 오후 5시까지를 ‘잃어버린 7시간’, 또는 ‘세월호 7시간’이라고 명명하며 의혹을 제기하곤 했다. 혹자는 이날 내가 굿을 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호텔에서 정윤회씨와 밀회중이었다고 했다. 또 ‘성형 시술을 받았다’ ‘프로포폴을 투여했다’ 등의 이야기도 떠돌았다. 나중에 재판에서도 다뤄졌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날조에 불과한 내용이다.
나는 세월호 구조가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 오후부터 매시간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언론에서 보도된 대로 ‘전원 구조’가 적힌 보고서를 기대하고 있을 무렵인 오후 1시7분 안보실에서 ‘370명 구조’라고 적힌 새로운 보고서를 올렸다. 6분 뒤 김장수 안보실장도 유선으로 “190명을 추가 구조해서 현재 370명 구조입니다”라고 재차 보고했다. 많은 인원을 구조해 반가웠지만, 여전히 ‘전원 구조’라는 언론 보도와는 수치가 달랐다. 그래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언론보도와는 차이가 있는데, 구조 상황을 다시 확인해서 정확하게 보고해 주세요”라고 지시했다(오후 2시11분).
초조하게 기다리던 다음 보고가 들어온 것은 오후 2시50분이었다. “죄송합니다. 190명을 추가로 구조했다는 것은 중복 보고입니다. 잘못된 보고입니다”라는 안보실장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나는 2시57분에 안보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왜 구조인원 집계가 이렇게 혼선을 빚는 겁니까. 철저히 파악하세요”라고 질책한 뒤, 한시라도 빨리 중대본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오후 3시).
최대한 빨리 중대본으로 가자고 지시했지만, 경호실에서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 기다려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동 때문에 교통 통제를 해야 하니 경찰청과도 협의해야 하고, 중대본에도 연락해야 하니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것이다. 사실 대통령이 어딘가를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답한 뒤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미용사가 왔다는 연락이 왔다. ‘호출한 적이 없는데, 미용사가 왔다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청와대 관저 직원이 나의 외출 준비를 위해 미용사에게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경호실에서는 연락이 없는 상태였고, 긴장한 미용사는 “제가 빨리하면 금방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미 여기까지 온 그녀를 돌려보내기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결국 경호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머리 손질을 맡기기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 중 하나다. 이때 경호실에서 준비할 시간을 기다려 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출발하세요”라고 말하면서 밀어붙였어야 했다.
물론 내가 이때 조금 더 일찍 중대본에 갔다고 해서 구조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국가지도자가 대책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국민에게 그런 모습을 빨리 보여주지 못하고 이날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비친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오후 3시30분에는 정무수석실로부터 ‘구조 인원 166명, 사망 2명’이라는 서면 보고가 왔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문제는 이때까지도 경호실에서 연락이 없었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준비가 늦어지는 거죠?”라고 독촉했더니, 중대본 앞에 무단 주차한 차량 때문에 안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차주가 확인되지 않아 이동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날 상황을 고려하면 일단 중대본 근처까지 차로 이동한 뒤 도보로 이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도 당시에 마음이 급해서인지 차분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애태우기만 했던 것이다. 이날은 한 번 잘못 채워진 단추처럼 계속해서 뭔가 어긋나고 있었다. 결국 경호실에서 중대본 방문 준비가 완료됐다고 보고가 들어온 것은 오후 4시30분, 내가 중대본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15분이었다.
◆‘세월호 올림머리 90분’ 언론 보도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의혹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언론은 박 대통령이 당시 관저에서 90분간 머리 손질을 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여기에 중앙대책본부 방문을 앞두고 깔끔한 헤어스타일이 부담스러웠던 듯 일부러 부스스한 모양으로 머리를 연출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16년 12월 6일 한겨레와 SBS 보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 당시 서울 강남의 유명 미용사를 청와대로 불러 관저에서 올림머리를 하는 데 90분 이상을 허비했다.
또한 중앙대책본부 방문이 결정된 사고 당일 오후 3시 전후에 이 미용사는 연락을 받고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의 머리를 다소 부스스하게 꾸민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박 대통령의 전담 미용사는 청와대에 몇 시에 다시 갔느냐는 질문에 “말 잘못했다가는 죽음이다. 몇 시에 갔는지 이런건 모르겠다. 나중에 다 밝혀질텐데 제가 할 말이 없다”라고만 답했다.
하지만 이 미용사는 “제가 (세월호 참사 당시 머리 손질을) 하긴 했어요”라며 중대본 방문 당시 머리 상태가 평소의 올림 머리와 달랐던 데 대해서는 “일부러 왜냐면 옷을 그런 옷을 입으시잖아요. 그리고 그 때 좀 비상사태였잖아요. (일부러 머리를 그렇게) 그런 거죠”라고 답해 논란을 낳았다.
앞서 한겨레신문은 2016년 12월 7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세월호 가라앉을 때 올림머리 하느라 90분 날렸다’는 제목의 기사를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드러나는 '세월호 7시간’이란 소제목도 붙였다. 3면에도 관련 기사들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이날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표결 사흘 전이었다.
한겨레가 작성한 12월 7일자 1면 톱기사를 “세월호가 가라앉던 2014년 4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은 승객 구조 대책을 마련하는 대신 강남의 유명 미용사를 청와대로 불러 ‘올림머리’를 하는 데 90분 이상을 허비한 것으로 6일 확인됐다”고 시작했다. 이어 “의문의 7시간 가운데 1시간30분은 밝혀진 셈이나, 나머지 5시간30분 동안은 무엇을 했는지 의문이다”라고 썼다. 리드부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기에 충분한 기사였다. 또한 “이른바 ‘골든타임’ 와중에 최소 90분을 허비한 것”이라며 비난했다.
앞서 외신들은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4월 21일)에서 “선장 이준석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라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의 세월호 참사는 진정 끔찍하지만, 살인이 아니다’(The South Korea ferry disaster is truly awful, but it is not murder)는 기사에서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 비극은 극심한 감정을 유발하지만 세월호 선원들에 대해 너무 쉽게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며 “번역의 복잡함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살인자’란 단어는 눈에 띈다”고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역시 “박 대통령, 세월호 선장에 ‘살인과도 같다’…옳았나?’”Was Park Right to Condemn Ferry Crew?)라는 기사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사고 초기 (구조자 수 집계 등) 오보와 느리고 분별력 없는 대응으로 비판받은 정부의 재해 대처에 대한 주의를 돌리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이 나온다”고 주장해 논란이 있다.
한편,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에 직접 내려가 JTBC 뉴스를 진두지휘했던 손석희는 두 가지 '가짜뉴스'를 직접 만들었다. 하나는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다이빙벨을 이용하면 20시간 연속 잠수할 수 있어 수색작업을 빠르게 할 수 있다'는 거짓 주장을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방송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부의 요청으로 구조작업에 투입됐던 민간 해양공사전문업체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가 고의적으로 시신 수습을 지연했다는 잠수사 강대영 씨의 일방적 주장을 인터뷰 형식으로 방송했다. JTBC의 잘못된 보도는 시청자들에게 당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JBC뉴스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진실과 정의를 지향합니다.
JBC뉴스 주인은 자유대한민국 국민 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발적 구독과 후원은 뉴스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