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 추진과 촛불집회가 연일 들끓었던 2016년 12월 초 소설가 이문열씨는 조선일보의 ‘위기의 대한민국…보수의 길을 묻다’ 5번째 화자 기획물에 글을 썼다. 이 씨는 당시 “위기의 보수, 쇠퇴하고 허물어진 정신의 허울부터 벗어야”는 제하의 글에서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라고 강조했다.
이 글은 당시 좌우 양측에서 질타를 받았다. 이 씨는 광화문 광장의 촛불 집회를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비유했고, 또 ‘죽어야 한다’는 그의 글을 두고 논란이 거셌다. 박근혜가 죽어야 보수가 산다는 식으로 읽혔다.
◇아래는 이 씨가 썼던 글 전문이다.
죽기 좋은 계절이다. 참으로 많은 죽음이 요구되고 하루라도 빨리 그 실현이 앞당겨지기를 요란하게 기다리는 시절이다. 매스컴은 그런 죽음을 예고하고 혹은 초대하는 이야기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악머구리 들끓듯 하고 광화문광장은 벌써 두 번째로 백만을 일컫는 촛불에 휘황하게 밝았다.
아주 예전에 읽어 제목과 지은이조차 기억에 가물가물한 이탈리아 극본 한 편이 떠오른다. 어느 나라인가 여왕의 어지러운 통치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 국가권력은 전복되고 여왕은 잠적하였다. 폭도가 수도 길목을 막고 여왕을 수색하는데 어느 새벽 여왕을 빼닮은 창녀 하나가 재수 없게 걸려든다. 폭도는 그 창녀를 끌고 가 며칠 심문이랍시고 갖은 모욕과 고통을 주며 그녀가 여왕임을 자인케 한 뒤 엉터리 재판에 넘겨 처형장으로 보낸다.
그런데 형장에 이르자 그렇게도 자신이 여왕이 아님을 주장하고 살려주기를 애원하던 그 창녀가 홀연 여왕의 의연함과 위엄으로 군중 사이를 가로지른 뒤 총살대 앞에 선다. 자신을 여왕이라고 믿고 있는 군중을 위해 여왕의 기품과 비장함을 스스로 연출한 것인데, 놀랍게도 군중은 진정한 애도의 눈물과 탄식으로 자신들의 여왕을 보낸다. 보아라, 우리의 여왕이시다. 여왕께서 의연히 죽음과 맞서신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창녀는 세상의 그 어떤 여왕보다 더 품위 있고 고귀한 여왕이 되어 죽는다.
또 16세기 수피즘의 시인 술탄 바후의 노래 가운데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 사랑하는 이는 기꺼이 맞네/ 그래야만 참으로 사는 거니까.’
그리고 또 다른 노래에서는 마호메트의 금언을 빌려 한 구절 보탠다. ‘여보게 바후/ 죽기 전에 죽세/ 그래야 그분께 이를 수 있다네.’ 여기서 죽기 전의 죽음이란 정신적 죽음, 참다운 소생을 위한 낡은 정신의 죽음 같은 것을 말하지만 요즘 같은 때는 왠지 되새겨 보게 되는 구절이다.
무엇에 홀린 듯 여성 대통령의 미용이나 섭생까지 깐죽거리며 모욕과 비하를 일삼다가 그것도 특종이랍시고 삼류 도색 잡지도 다루기 낯간지러운 사생활에 대한 억측과 풍문을 무슨 큰 폭로라도 되는 것처럼 뉴스로 쏟아내는 매스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무슨 교수, 무슨 평론가, 무슨 전문가 해서 풍채 좋고 언변 좋은 양반들이 온종일 종편이 펼쳐준 좌판에 몰려 앉아 대통령 여당 몰매 놓기로 의식 수준의 고하를 겨루거나, 대통령 속곳까지도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최가네 일족 잡상스러움을 시시덕거리거나, 문고리 몇 인방이니 친박 개박 매화타령 하며 킬킬거리는 모습이 보기 민망스럽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입 냄새도 안 나는지 저쪽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입 꼭 다물고 앉은 대통령이나 집권 여당의 논객들은 지난 몇 달 매스컴의 모진 찧고 까불기에 여지없이 부서져 보수의 위기라는 말이 실감 나게 만들었다. 위기란 곧 존립이 위협당한다는 것, 먼저 죽어 거듭나지 않으면 보수의 미래는 없다. 이 쇠퇴하고 허물어진 정신의 허울 벗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보수는 다시 발 디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죽어라, 죽기 전에'는 문고리나 친박 비박뿐만이 아니라 보수 일반의 정신에까지 여전히 유효한 권유가 된다.
이제는 매스컴이 스스럼없이 '국민의 뜻'과 혼용하는 광장의 백만 촛불도 마찬가지다. 지난번에 문재인 후보를 찍은 적극적 반대표만도 1500만표에 가까웠고, 대통령 지지율 4%가 정확한 여론조사였다면 이 나라에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유권자만도 3000만이 훨씬 넘는다. 아니,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친다면 4500만도 넘는다. 하지만 그중에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그것도 1500단체가 불러내고, 매스컴이 일주일 내 목표 숫자까지 암시하며 바람을 잡아 불러 모은 숫자가, 초등학생 중학생에 유모차에 탄 아기며 들락날락한 사람까지 모두 헤아려 만든 주최 측 주장 인원수가.
심하게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찌하랴. 그 촛불이 바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성난 민심이며 또한 바로 ‘국민의 뜻’이라는 것은 지난 한 달 야당의 주장과 매스컴의 호들갑으로 이제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논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큰 뜻을 거역할 수 없어 가까운 날 대통령의 자진 사퇴라도 이루어지면, 그래서 비상한 상황의 권력 변동이 일어나면 보수의 위기는 한층 더 확정적인 사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보수의 길은 하나밖에 없다.
죽어라, 죽기 전에. 그래서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으로 태어나 힘들여 자라가기를. 이 땅이 보수 세력 없이 통일되는 날이 오기 전에 다시 너희 시대를 만들 수 있기를.
당시 이 씨의 글을 다시 소환해서 읽어보았다. 보수에 대한 비장한 애정이 묻어있는 글이었다. 용기없고, 비겁하고 기득권 기회주의 보수에 경종을 울린 그의 글은 보수의 활로에 관한 해답으로는 매우 정확했다.
이 씨의 글은 과거가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 글이다. ‘보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그 반복의 역사다. 당시 이 씨의 권고대로 보수정치인이 죽었다면 새로운 보수정치인으로 채워졌다면 보수의 이런 죽음의 악순환 논쟁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지키기 위해 보수가 보수를 죽이는 형국이 작금의 보수다. 아주 사악한 생존법이 몸에 배어있다. 좌파들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다시 점화시켰다. 이를 바라보는 보수의 시각도 대립 갈등 충돌의 연속이다. 혹자는 ‘윤석열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한다. 반면 ‘윤석열이 죽으면 나라도 죽는다’고 반박한다.
윤석열이 살든 죽은 대한민국은 정의롭지 못한 자들의 위악적 행위가 대한민국을 지켜온 정통 자유보수우파 국민마저도 이렇게 양분화 되어 있다.
보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문재인식 재앙적 국가’와 ‘문재인식 좌파독재’를 경험했지만 지금 그 때를 잊고 잊어버린다. 보수의 망각은 보수의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
‘필사즉생(必死則生)’은 죽어야 산다는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이같이 말하고 왜선을 격퇴했다. 이순신 장군의 좌우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풀어쓰면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必死則生 必生則死)’
세상에 영원히 사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없다. 死生 命也 其有夜旦之常 天也 人之有所不得與 皆物之情也(사생 명야 기유야단지상 천야 인지유소부득여 개물지정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그것은 밤과 아침의 일정함처럼 하늘이 하는 일이다."<장자 ‘대종사>
왜 보수의 정치판은 죽지 않고 좀비처럼 오늘도 여의도 상공을 배회하는 것일까. 보수의 정치는 죽음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법칙에서도 역행중이다. 보수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은 사악한 욕심이다.
‘보수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는 이문열의 글을 다시 찾아서 읽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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