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원수처럼 갚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자들은 하나같이 매몰차게 버리면서 나온 말이다. 박근혜는 2015년 6월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자”고 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의 이 발언은 박근혜에게 부메랑이 되었다. 2021년 12월 말 사면복권 된 박근혜는 자신을 지켜주고 대신 싸워준 국민을 배신해 버렸다. 박근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리고 구해주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배신했다. 박근혜가 탄핵과 구속당하자 3선 의원을 벗어던지고 8년간 국민과 함께 진실투쟁을 해왔던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까지 짓밟아버렸다. 본지는 ‘박근혜의 배신’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은 대통령이 됐을까.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일으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혁명의 당위성을 인정받았던 것은 당시 육사생들의 지지였다. 전 전 대통령은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주도하는 등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목숨까지 지켜주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다.
한국군 복장을 한 이들은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29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 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전두환은 이들을 소탕할 수 있었던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청와대 외곽 경비를 책임졌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전두환이 없었다면 청와대가 뚫렸을 것이고, 아마도 박 대통령과 주요 인사가 암살 당했을지도 모른다. 전두환은 1967년 8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에 임명된 직후 청와대 주변 산세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적들이 침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 전 대통령은 경비는 1%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를 하는 것이라 했다.
전 대통령은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만에 하나 무장공비의 청와대 출몰 등에 대비, 조명탄과 박격포를 쏘울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경호실과 청와대 인사들은 “청와대는 경비가 철저해 개미새끼 한 마리도 들어 올 수 없다”봤지만 전 전 대통령은 시각은 달랐다. 결국 전 전 대통령은 뜻을 관철시켰다.
그 후 2개월 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기습공격을 강행했고, 이들은 새검정 등 청와대 인근서 조명탄이 펑펑 터지자 혼비백산 도망쳤고, 그 과정에서 한 명은 북으로 도망쳤고, 김신조가 체포됐다.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었다.
만약 전두환의 항시 대치체제를 통한 박격포 및 조명탄이 없었다면 무장공비들이 청와대까지 침투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조명탄은 밤새도록 청와대 인근 새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히며 무장공비를 대거 소탕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박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을 크게 신임했다는 후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전두환 신임은 이어졌다. 박정희는 1979년 3월 5일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전두환 당시 1사단장을 앉혔다. 당시는 정기 군인사 기간도 아니었다. 전 전 대통령의 보안사령관 임명은 당시 군내부에서도 가장 파격적 인사였다. 보안사령관은 별 세 개 ‘쓰리스타’가 가는 자리였지만 당시 전두환은 별 두 개를 달았던 ‘투스타’신분이었다.
이를 두고 허평환 전 기무사령관은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할 것을 미리 예견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보안사령관에 앉힌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돌았다”고 했다.
김재규는 그해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만찬에서 박정희를 시해했다. 그 다음 날 계엄령이 선포됐고, 계엄령령에 따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박정희 시해사건 전모를 밝히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박근혜는 그런 전 전 대통령을 말살과 죽이기 5공 흔적 지우기에 앞장섰다. 박근혜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반면 박정희 정권 시절 소요와 폭동을 주도하고 시해 빌미를 주었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문턱이 닿도록 찾아뵙다.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명절 때마다 비서관을 보내서 선물을 전해드렸다. 전 전 대통령에게는 선물조차 보내지 않았다.
박근혜가 전 전 대통령을 말살시키기 시작한 것은 최태민 목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5공의 한 핵심인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최태민 목사를 전방에 보낸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업고 많은 물의를 일으켜 10·26 직후 전방 군부대에 격리 조치했다.
역사학자 이주천 전 원광대 교수도 “박근혜가 전두환 죽이기에 나선 것은 전 전 대통령이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 관계를 끊어놓기 위해 최태민을 전방에 보낸 그 앙갚음일 것이다”고 지적했다.
이 전 교수는 “‘공’과 ‘사’를 분간 못하는 박근혜가 사적인 감정을 공적 감정으로 엮어서 이런 꼴이 났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태민은 최서원 씨(청주여자교도소 수감중)의 아버지다. 살아생전 김종필 전 총리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김 전 총리는 “박근혜와 최태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침부터 깜깜할 때까지 뭔 얘기를 하고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들어앉았다”며 “오죽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그 최태민이란 놈 조사 좀 해 봐. 뭐하는 놈인지’ 그랬을까. 김재규가 ‘아버지가 조사를 지시한 것’이라고 했더니 ‘근혜’는 ‘맘대로 해 보라’며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쳤어요.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지”라고 말했다.
당시 김 전 총리를 인터뷰한 언론은 김 전 총재에게 “박근혜에 대해 한마디만 더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김 전 총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야.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이야”라고 말했다.
김 전 총리는 박근혜에 대해 조언도 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싫어. 잘못 얘기하면 묘(墓) 속에 들어가서도 나를 미워할 거야. 그 정도로 지독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끝내 김 전 총리를 외면해 버렸다.
박근혜가 동생 박근령 씨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최태민 때문이다. 박 씨는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누나(언니)를 최태민에서 구해주세요”라는 탄원서를 보냈었다. 이 일로 인해 박근혜는 동생을 내쳤다. 박근령 씨는 이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박근혜로부터 찍혔던 이들은 모두가 최태민 쓴소리였다.
전 전 대통령이 그런 최태민을 전방에 보내 박근혜와 단절시켰으니 박근혜 입장에선 이것은 먼 훗날 보복이 잉태한 것으로 봐야한다. 박근혜는 유영하 변호사(현 의원)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도 방어벽을 쳐주었다. 유 변호사를 비난 한 사람들에 대해 “유 변호사가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우회적으로 감싸 안았고, 비난한 자들은 모조리 멀리했다.
유영하를 안은 박근혜가 조원진 대표를 내치면서 진실과 정의를 말살시켰다면 박근혜의 전두환 말살은 보다 더 심각하다. 결국 박정희 시해범 김재규를 영웅화시킨 1등 공신이 박근혜다. “김재규가 유신독재에 총을 쏘았다”는 김재규 시해의 당위성이 국민속에 자리잡은 것은 박근혜의 전두환 말살과 죽이기가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전두환 죽이기는 결국 김재규를 되살려 준 셈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전 전 대통령을 재산을 모조리 추징토록 하기 위해 ‘전두환 특별법'을 만들게 했다. 이는 ‘전두환 보복법’에 가깝다. 전두환 보복과 죽이기는 5공 정통성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업적과 평가마저 모두가 불신 불의토록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김대중 영웅화', '5.18 민주화', '5.16 쿠데타', '유신 헌배 위배'를 더욱 굳히게 했다. 박근혜의 무식과 무능 무지가 낳은 사적 감정이 대한민국을 반역의 역사로 쓰여지도록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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