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대 실형, 그냥 눈물이 나, 누구를 위해 종을 울렸나
손상대 실형, 그냥 눈물이 나, 누구를 위해 종을 울렸나
  • JBC까
  • 승인 2017.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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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였다가 작가로 전환한 후배의 감성 수필집이 생각난다. 제목은 ‘그냥 눈물이 나’.

아마도 태극기를 든 모든 사람들의 심경을 이 제목이 대변해주는 거 같다.

지난 1일 태극기 집회 사회자 손상대와 탄기국 대변인이었던 정광용씨의 1심 재판 결과가 나왔다. ‘징역 2년.’

나는 일본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도쿄 한 호텔 커피숍서 일본 기자들과 한국과 북한 등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은 후 놀라면서 멍 때리는 표정을 짖자 일본 기자가 “정상,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일 없다”면서 애써 표정을 바로잡았다.

폰을 보았다. ‘손상대 실형’을 비난하는 SNS글이 쏟아졌다. 나는 일본 지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이상한 분노가 치솟았다. 양해를 구한 후 호텔의 다른 장소로 옮겼다.

이곳에서 셀카를 통해 손상대 실형 속보를 전했다. 그 후 한국에서 보도된 언론 기사를 검색해 봤다.

'과격 집회' 정광용ㆍ손상대 징역 2년…"시위대 폭력 유발", “헌재 박살내자” 했던 정광용·손상대, 징역 2년 실형. 예상했던 대로 제목이 선동적이었다.

한국 지인들이 카톡과 문자로 연락해 왔다. “언제 오십니까” 나는 ‘눈팅’만 했다. 답변은 하지 않았다.

손상대가 실형을 받았다는 소식에 만감이 교차했다. 손상대씨와의 인연은 오래됐다. 각별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이었다. 그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던 것은 지난 1993년 초 였다. 김영삼 씨가 대통령에 당선 된 후 였다.

당시 상도동 좌장 격인 서석재 전 총무처장관(2009년 작고) 인터뷰를 같이 하면서다. 나와 손씨는 김해발 비행기 안에서 만났고, 그후 부터 형-동생 사이로 발전했다.

그와 함께 마신 술과 양을 계산하면 알 수가 없다. 세상의 술은 다 마셨다. 까방송 전에는 일주일에 한번꼴로, 함께 방송을 하면서는 매일같이  마셨다.

그와는 JBC까 방송으로 호흡을 맞추었다. 태극기 시민들은 나와 손씨가 어쩜 그렇게 호흡이 잘 맞냐며 명콤비라고 추켜 세워 주곤 했다. 실제 일상에서 그랬다. 나와 그는 서로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 지 안다.

JBC까 시작은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2012년 9월 쯤, 언론사 후배 전화가 왔다. 정치에 입문한 그는 한 지역구 위원장이었다.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후배였다.

그는 나에게 인터넷 방송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기자 시절 잘 까고 탐사보도전문이었던 내가 딱 적임자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나는 훗날 인터넷 방송이 뉴미디어 대세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후 시작했다. JBC까는 그래서 2012년 10월18일 탄생했다. JBC는 나의 성과 영문 이름 이니셜이다. 나는 언론계에선 JBC로 불렸다.

 

 

나는 JBC까 방송 지향점을 종북 좌파 쓰레기 청소로 잡았다. 각종 취재 현장 갈 때 마다 느꼈던 것인데, 이들을 청소하지 않고는 대한민국 미래가 없다고 보았다.

훗날 이들이 대한민국을 집어 삼킬 것으로 예상했다. 평소 종북 좌파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손상대씨도 그 때부터 동참했다.

JBC까는 종북 좌파 실체를 알리고 대한민국 자유체제를 지키는 방송으로 오직 한길만을 걸어왔다. 손씨는 아주 사회를 잘 보았다. 각종 크고 작은 행사에 불려가곤 했었던 손씨.

나는 그가 태극기 집회 사회자 였다는 것은 몰랐다. 지난해 11월말 토요일 오후였다. 동대문 시장 부근은 차량 정체가 극심한 곳이다. 그날따라 더 정체였다. 알고 보니, 구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나는 차 창문을 내리고 그 집회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상대 목소리 였다.

차량이 조금씩 이동해서 나는 목을 뒤로 돌리면서 대형 스크린을 보았다. 손상대가 맞았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하야와 탄핵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매일 광화문 광장에선 촛불 집회가 열렸다.

박 대통령 지지율이 5%까지 떨어질 때다. 박 대통령을 동정하거나 지지를 하면 미친 수구 꼴통 사람 취급을 받았을 때다.

당시 한 언론사 간부였던 난 박 대통령을 지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상대가 왜 저런 데서 사회를 볼까 놀랐다. 나는 그날 저녁 그에게 전화를 했다. 이틀 뒤 만났다.

당시 나는 그와 잘 만나지 못했다. 탄핵 정국과 함께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아서 까방송을 소홀히 할때다. 이러바보니 대신 손씨가 외부인들을 불러 들여 까방송을 했다.

언론사 책상에 걸터앉아 한번 씩 까방송을 보면 마치 박근혜 지지만 하는 방송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손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씨에게 이런식으로 방송을 하지 마라고 했다. 손씨는 능청스럽게 못들은 척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한번 까지---” 나는 어이없어했지만 그 소리에 바로 “오케이” 했다. 오케이 한 것은 까방송을 통해 손까의 그런 사고를 까고 싶었다.

그런데 반대가 되었다. 내가 까였다. 손까가 옳았고, 내가 틀렸었다.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세력이 종북 좌파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한 정치권의 기획, 마녀사냥에 앞장서는 언론. 이런 광기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나는 까방송을 하면서 고해성사를 해버렸다. 

비겁하게 나는 여론이라는 미명하에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와 “아니다”와의 충돌. 솔직히 여론의 95%는 박근혜 대통령을 질타 했었고 나도 이에 따르면 그만이었다. 

또 그 길은 이제까지 내가 가 본적도 없고, 쌓아온 가치를 버리는 것이었다. 가장의 책임은 가족 부양이 가장 우선이다. 회사를 나왔을 경우 먹고 사는 게 제일 걱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회사를 잘리더라도 까겠다. 운명을 하늘에 던졌다.

손까에게 말했다. 지금의 탄핵 정국 본질과 언론의 무차별 마녀사냥식 보도 등을 까자. 지난해 11월말부터 거침없이 까고 깠다. 소속 언론사에서 퇴근하면 달려와서 깠다. 주변에선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지난 3월 중순 방송 후 쓰러졌다. 뇌신경 조직에 이상이 생겼고, 간 수치 등 모든 신체 기능이 10% 미만이었다. 의사는 돌연사 직전에 병원 왔다고 했다. 나는 일주일 입원 후에도 까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갔다.

이런 헌재의 탄핵 인용, 특별검사의 무자비한 수사,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한민국 법치와 헌법이 무너지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지난 3월 말이었다. 손상대가 종로경찰서로 출두했다. 10일 집회가 문제가 되었다. 그는 “괜찮다”는 말했지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시국흐름과 각종 사고에 한해서 나의 촉은 백발백중이다.

그는 압수수색을 당했다. 그는 5월 구속되었다. 당시 그가 구속될 즈음 나는 더이상 회사에 몸담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이직을 결심했다. 나의 이직설이 나돌자 언론사 서너군데서 연락이 와서 편집국장 제안을 했었다.

주변에선 안정적인 언론의 길을 계속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JBC까를 선택했다. 

내 스스로 타 언론사 편집국장을 하면서 까방송에 발을 걸치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손상대! 동료이자 선배가 구속된 마당에 한 손에 국화, 한 손엔 칼을 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얻은 게 없으므로 잃을 것도 없다. 모든 것을 내걸고 지금의 길을 걷는다. 하나 바람은, 손까가 자유의 몸이 되면 함께 방송을 하면서 대한민국 자유체제를 살리고,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방송으로 만들고 싶었다.그런데 지난 1일 손까는 2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어제 저녁 도쿄에서 술을 마셨다. 여기 저기 옮기면서 마셨고, 숙소로 맥주를 사온 후 마셨다, 맨 정신으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나는 지난 2006년 12월 말 일본에서 책을 출간했다. 당시 손까는 일본에서 가졌던 나의 출판긴기념 행사에 달려왔다. 나는 손까와 함께 가끔 일본에 오곤했다.

 

 

그와 일본에 오면 신주쿠 등지에서 술을 마셨다. 또 오사카 돈톤보리, 아모모리까지 가서 마셨다. 어제 그와 마셨던 술집 부근에 있었다.

“야, 우리 인생 뭐 있나. 늘그막에 편히 살면서 마셔야지---” 그의 말이 귓가에 멤돌았다.

손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하고 선한 배고픈 선비였다. 우리는 한 잔의 술 잔을 부디치면서 인생을 노래했다.

실형 받은 후 차디찬 교도소에서 지낼 그는 생각하니 그냥 눈물이 난다. 한국에 돌아가서 “손까 깝시다”하면 재회 할 것으로 믿었다. 허망하다.

손까의 실형앞에 나의 이런 글들이 유치하다. 나의 글에서 비린내 마저 느껴진다. 

손까, 그리고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릴까. 답은 하나다. 이 대한민국이다. 

자손만대 이 대한민국이 아파하고 있다. 외면할 것인가, 종을 울릴 것인가. 

타인에 의해서 아니다. 스스로 종을 울렸다.

JBC까 방송의 종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 신은 손까, 손상대에게 잠시 시련을 주었다.  손상대, 손까 종소리 울림은 더욱 커질 것이다. .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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