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필자는 일본 도쿄와 서울에서 박근혜 대통령 여동생 근령씨(66)와 수십 번에 걸쳐 인터뷰를 했었다. 당시 일본의 한 출판사가 근령씨 회고를 통해 밝히는 내용을 담아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버지 박정희·육영수 여사에 대한 책을 내고자 결정했다. 그러나 책은 1차 원고가 완성됐지만 끝내 출간되지 못했다. JBC뉴스가 연재하는 글은 당시 출간되지 못했던 글을 일부 발취한 것이다. 시점은 3년 전이다. 이 글은 근령씨가 밝히는 언니와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다. [편집자 주]
어머니(육영수 여사)를 모르고 언니(박근혜 대통령)을 이해할 수 없다. 언니를 엄하게 양육한 사람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언니는 ‘나의 어머니 육영수’에서 어머니의 자녀교육철학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을 키우시며 가장 신경 썼던 일 중의 하나는 행여 대통령의 자녀라는 특권의식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저희들이 편한 생활을 하려 하고 나의 노력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무슨 일을 해결하거나 물건을 갖게 되는 일을 엄하게 금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도 훨씬 엄한 분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간혹 친척들과 청와대 인사들이 해외여행길에 산 것이라며 선물을 가져올 때면 어머니는 절대 받지 않으셨다. 이를 갖고온 사람들을 나무랐다.
어머니는 항상 저희들을 훈계하셨다. 어머니는 자립심을 많이 강조하셨다. 중류가정 정도의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앞날을 개척할 수 있는 자립적이고 적극적이며 또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고 했다.
부모의 지위에 대한 의타심을 버리고 가난한 한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자각 속에서 겸손하게 자라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당장에야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예 새로운 것, 좋은 것을 가지겠다는 욕심은 단념하고 살았다.
1967년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비서가 아들을 일류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제비를 뽑는데 확률을 높이려고 이웃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3명을 동원해 지원서를 제출했으나 다행히 아들이 뽑혔다며 어머니 앞에서 자랑을 했다. 어머니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준엄하게 타일렀다.
“일이 정상적으로 되었으니 망정이지 동원된 아이가 당첨된 뒤에 그걸 물려받았더라면 위법뿐 아니라 인권유린이에요. 아이를 일류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어머니 마음은 다 같아요. 그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식만 넣으려 하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죠?”
며칠 후 어머니가 비서를 불러 “내가 좀 과하게 말을 한 것 같다”고 사과하자 비서는 펑펑 울어버렸다고 한다.
동생 지만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는 그림숙제를 위해 도화지로 사용할 종이를 비서실에서 얻은 것을 알고는 “종이 한 장도 국가 재산”이라며 돌려주었다. 어머니는 청와대 복도에 전기불이 켜져 있으면 일일이 다 끄고 다니셨다.
어머니는 예의범절을 무척 강조하셨다. 거짓말을 하면 호되게 야단치셨다. 잘난 척하지 말고 남 무시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라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특히 남들의 부러움을 사지 말라고도 하셨다. 언니와 나, 동생은 학창시절 남보다 좋은 학용품을 가져 본 기억이 없다. 비서가 차를 태워주더라도 절대 등을 의자에 기대어 앉지 마라하셨다. 만에 하나 신호등이 걸려 차가 잠시 멈출 때 버스안이나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면 아주 거만하고 건방지게 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대통령의 자식이기에 특별하게 성장하는 것을 늘 경계하셨다. 어머니는 늘 ‘청와대를 나오면 신당동 집으로 돌아갈 텐데 특별대우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참 부지런하셨다. 밤늦게까지 서민들의 하소연이 담긴 편지를 일일이 읽고 답장을 하시느라 바빴다. 어머니는 그래서 우리에게 ‘엄마가 너무 바빠서 미안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몇 년 전 동생이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재산 모으는 것,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늘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뿐이셨다. 서민들의 삶을 직접 보고 오실 때는 ‘가슴이 아파 그냥 올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하셨다. 그러면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 계셨고… 생활이나 다른 면에서는 아버지 뜻대로 하셨지만 정치를 둘러싸고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린다거나 아버지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이야기하셨다. 대개 아버지가 틀리고 어머니가 맞았다.(웃음) 큰소리는 아버지가 치셨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아버지를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물론 모두 아버지와 국가를 위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지혜로운 분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특히 나환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 우리들에게 ‘너희 어머니 정말 대단해, 대단해’ 하시면서 자랑스러워하셨다.
실제로 어머니 활동 중에 나환자 돌보기 사업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을 지냈던 많은 사람들은 나환자와 악수하면서 미소 짓던 어머니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어머니가 나환자한테 관심을 갖게 된 건 1965년 봄이었다. 식목일이 다가오자 몸은 비록 불편하나 꽃을 보며 마음을 환하게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꽃씨 상자에 담아 나환자 마을에 보낸 게 시작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일반 목욕탕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공중목욕탕을 지어주는 등 그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한번은 나환자를 부모로 둔 아이들이 같은 학교 학부형들의 집단행동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환자촌 아이들 100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동생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비서 한 사람만 데리고 나환자촌을 찾기도 했다. 얼굴은 찌그러져 있고 호미를 들고 있는 손도 마디가 떨어져 나간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코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리며 직접 손수건으로 코를 닦아주었다.
한 소녀가 드링크 한 병을 들고 여사 앞에 놓더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어른들이 미리 연습을 시킨 것 같았다. 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건 서울 가는 차 안에서 마실 테니 냉수를 한 그릇 달라” 하고는 맛있게 마셨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한편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들을 벌레 대하듯 하는 게 세상인심인데 영부인이 악수는 물론이요, 자기들이 쓰는 그릇에 담긴 물까지 맛있게 마시고, 뭉개진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늘 소외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아파해주셨다. <계속>
◇박근령=1954년생, 박정희 대통령 둘째딸, 박근혜 대통령 여동생, 경기여고-서울대 작곡가 졸업, 배우자 신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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